
카라바조 그 매력 있는 이름의 가치
수백 년. 아니 인류의 태생부터 함께 존재해온 미술의 태생을 알아볼 때 이 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찾기는 쉽지 않다.(좋게 말해 매력적인 것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세상 사람 다 피곤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지만..)
전체 이름을 보자면 미켈란젤로 메리시 디 카라바조. 본명이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같기 때문에 카라바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미술사에서 이 두명의 이름값에 저울을 올린다면 압도적으로 우리가 흔히들 부르는 미켈란젤로의 완승이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 내 저울추는 카라바조 쪽으로 기운다.
카라바조과 활동하던 시대를 아주 잠깐만 언급하자면 르네상스 시대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서양의 모든 문화, 경제, 과학이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하여 후대의 모든 틀을 만들어내던 시기인데 내면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시대야 말로 보이는 면에 비해 숨겨진 어두움이 많은, 너무나도 양분되어 있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던 그 아름답고 인간중심적 예술작품들, 경제와 과학이 발전된 르네상스 시대의 이면에는 각 가문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신분과 권위가 올라갈 수 있을지 큰 고민을 하던 시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시대에도 역시나 모난돌 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카라바조 역시 그런 인물들 중 하나이다. (큰 의미 없이 사실 카라바조는 예술가적인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혁명가가 아닌 시대와 어울리지 못했던 한명의 예술가 일수 있으니..)
카라바조의 일대기와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들, 당시의 상황, 종교와 후원자등, 모두 풀어내기에는 내 지식의 수준이 썰을 풀만큼 크지 않고 정리도 잘 못하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올리고 거기서 느꼈던 감정들을 간단히 넣을 생각이다. 내가 현재 가진 직업은 빛을 어떻게 연출하는지가 전부일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고 그 요소들을 잘 보여준 작가가 카라바조다. (램브란트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다.)
과일바구니

미술, 디자인이나 음악쪽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을 거부하며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르네상스 초기, 아니 그 이전부터 정물만 독자적으로 나오는 회화는 없었다고 보고 있다. 카라바조가 한창 후원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후원자의 요청을 받은 걸 저렇게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일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그냥그리고 싶어서 저렇게 표현을 한 것인지는 여러 내용이 있지만, 그 당시 사과를 탐스럽고 아름답게만 그려내는것과는 사뭇 다르다.
종교적인 의미로써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를 모티브로 다들 그림을 그리던 시기니 당연히 사과는 모든 사람들이 탐내고 갖고 싶은 존재여야 했다.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는 그런 생각들을 무참히 짖밟으며 썩은 사과와 시들어버린 잎사귀들, 있는 그대로의 과일들을 바구니 속에 넣어버렸다.
부가적인 설명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그림 자체로만 판단을 했을 때 따뜻한 톤과 과일들의 디테일함, 바구니에 녹아든 빛과 그림자의 명암들. 아마 지금 사진으로도 저런 톤으로 표현된 사진이 있다면 싫어할 수가 없는 구도와 디테일함이다.
바쿠스

카라마조의 연출력에 감탄을 한 작품 두 점
“병든 바쿠스와 바쿠스"
바쿠스는 디오니소스라고도 불리는 풍요의 신이자 술의 신이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모습들을 스스로 그림에 많이 투영시켰는데 이 두 점의 바쿠스에도 환상적인 연출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병든 바쿠스의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채워지지 못해 그것을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림 밖의 사람들을 쳐다본다. 카라바조 그림의 특징인 강한 명암 대비로 그 표현을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그 눈빛과 반대로 “나에게 동정을 느끼는가?" 라는 연출을 소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바쿠스는 술과 풍요의 신이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술이 아닌 단지 포도 두 개와 복숭아들. 반대로 얘기하면 자신의 모습이 지금 가진 것은 없지만 난 지금도 그 욕망을 원한다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에 비해 청년 바쿠스의 그림을 보면 그가 좋아하는 명암대비가 인물에게 보이지 않아 진지한 분위기가 사뭇 덜하며 그림 속 바쿠스의 모습과 표정은 여유롭다 못해 마치 앞에 있는 그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당당하게 술잔을 내보인다.
"나는 당당하며 아름다워"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해줄수 있다는 눈빛을 보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림을 자세히 보면 청년 바쿠스의 술잔을 연출한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술잔이 흔들리는 것까지 표현을 하며 나는 지금이라도 당신에게 잔을 넘길수 있다는 생동감까지 만들어준다.
메두사

모두가 알다시피 메두사는 자신을 본 사람을 순간 돌로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은 메디치가의 방패에 그려진 그림이고 여기서 메두사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 방패를 보며 스스로 놀라있는 상황이다.
카라바조가 만들어낸 메두사는 보는이에게 공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공포에 질린 메두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건 메두사의 얼굴은 카라바조의 본인이다. 작업할 시기에 스스로 어떤 내면 속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자신을 메두사라는 존재에 투영시킨 카라바조의 연출력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림이 방패에 그려져 있어 실제로보면 뚜렷한 명암대비가 된 얼굴의 위치가 볼록한 방패 가운데 있어 그림에 더 집중이 된다.
성모의 죽음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서 성모마리아는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죽어서도 빛을 보여주는 존재이기에 그런 작품들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죽음은 어마어마한 후광이 비추고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고귀한 죽음에 모습에 교황과 그 주변인들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을 한다.
카라바조의 성모의죽음은 그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한 여자의 죽음에 창가쪽에서 내려온 작은 빛줄기는 쓸쓸하게 그녀를 비추고 있고 어떤 죽음인지에 대해 누군가는 속삭이고 누군가는 무책임하게 쳐다보고 있다. 슬프게 우는 사람은 단지 그 옆의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여자일 뿐.
제목이 없는 작품이었다면 일반 여자가 죽은 사실적인 그림일 뿐이지만 제목은 성모의 죽음이다.
더군다나 이 그림의 뒷 이야기로 성모의 죽음 작품 모델이 "창녀일 수도 있고 카라바조 정부이기도 하다."라는 소문까지 퍼지니 결국 그 당시 카톨릭계에서 거부당하게 되었다.
성 마테오의 소명

다섯명의 사람들은 오늘도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경제적인 이득이 있는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밖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와 다섯 명의 테이블 앞에 선다.
들어온 두명의 사내중 한 사내의 손가락이 갑자기 가운데 사내를 가리키며 나와 함께 하자고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테이블 앞 두명의 젊은이들을 본능적인 궁금함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테이블 뒤쪽의 두 명은 들어온 사내들의 행동에 관심조차 없다. 오로지 가운데 사내만당황하였다. 전혀 모르는 그가갑자기 나를 부르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는 그렇게 따라 나가게 되었다.
성 마테오의 소명에서는 그림속에서 강한의도를 가지고 빛을 표현하는데 그리스도는 오른쪽 어두운 부분의 얼굴 한면만 보이며 손가락으로 누굴 가르키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연극이나 오페라의 조명처럼 빛의 방향으로 하이라이트를 줘서 1차적으로 마테오에게 시선이 멈추게 만들고 마테오의 행동으로 확인까지 한번 시켜준다.
나르시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모습을 잡고 싶어 왼손을 호수에 넣얶지만, 잡힐 듯하던 그 아름다움은 어느새 일그러진다. 서서히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사랑에 빠진 그는 더욱더 슬픈 모습으로 물속에 비친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빛을 연출하는 데 너무나 탁월한 카라바조는 물 밖의 현실공간에선 아름답지만 슬픈 얼굴로 사람의 내면 속을 표현한다.
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에서는 빛으로 얼굴을 아름답게 표현할 법도 한데 얼굴의 명암대비가 약하고 어둡게만 보여주고집중도 잘 되지 않게 만들어 놓은 대신 비치고 있는 옷은 그래도 화려하게 그려놓으며 역설을 말하고 있다.
나르시스는 어쩌면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인가!"
현시대에 사람을 만나거나 sns등에서 자신을 어떻게 포장하고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수많은 기행과 사건사고로 항상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살인을 한 후 도망다니다가 또다시 다툼에 휘말려 그 삶을 마감하게 된다.
환상적인 연출력과 빛을 이용하던 카라바조가 지금시대에 살아 숨 쉬며 영화감독이나 작가로 활동을 했으면 과연 어떠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나 글을 쓰는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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